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비뇽 유수 (문단 편집) == 배경 == 1122년 '''[[보름스 협약]]'''의 체결로 주교 서임권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교황]]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단행된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한 이래, [[교황]]의 권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교황은 서유럽 세계를 지배하는 [[가톨릭]]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중부를 관통하는 [[교황령]]을 다스리고 십일조, 군주들의 기부금, 수많은 교구의 헌금 등 막대한 자금을 사방에서 받아내며 세속 군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도자이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한 ''두 개의 검 이론'''은 교황이 '영적인 검'과 '세속적인 검'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지시한 대로 사용한다는 조건하에 세속 군주에게 두 번째 검을 하사한다고 설파했다. 교황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세속 군주들에 대한 간섭을 서슴지 않았는데, 특히 신성 로마 황제를 복종시키기 위해 온갖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세속군주들이 영토의 확장과 관료제의 확립을 통해 세력을 키우면서, 13세기 후반에는 실권상으로 교황의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각국에서 [[관료제]]가 태동하고 영주들의 몰락이 확고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관료제와 세제의 확립으로 자연히 과세 대상인 백성의 파악도 활발해져 국경선의 중요성도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국경과 영지의 세력권 자체가 선이 아닌 점이었고,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 마을 밖으로 수 km 이상 밖으로 나가는 일 자체가 드물었던 시대라, 국경 지방의 경우 농노가 아닌 이상 [[프랑스인]]이 아침에 장터 가러 옆 동네 [[신성 로마 제국]] 영토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는 당시까지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국경선이 확립이 된 이후부터는 통행세를 내야 했고, 어길 경우 영토 침공으로 간주했다. 경제적으로도 12세기 이후 활발해진 영토의 개간으로 14세기까지 [[유럽]] 내에서 인구가 거주하지 않던 공지(空地)가 사라져 국경선의 확립에 일조했고, 이렇게 성장한 농업 경제를 바탕으로 상품 화폐 경제가 부활하면서 장원제는 쇠퇴하는 반면 왕권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는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경제력과 영토 확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듯 갈수록 강해지는 국왕들 중에서도 [[카페 왕조]] 프랑스 왕국의 국왕 [[필리프 4세]]는 국가 전체를 통제하고자 반항적인 귀족들을 토벌하고 자치를 누리던 플랑드르 도시들을 억압했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국고를 소모하면서 재정이 부족해지자,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제3계급에 대한 과세 확장을 시도하는 한편 교회에 대한 과세도 시도했다. 이는 서임권을 놓고 논쟁을 벌였던 [[카노사의 굴욕]] 당시의 상황이나 교회 인사에 대한 재판권을 놓고 [[토마스 베켓]]과 대립한 [[앙주 제국]]의 [[헨리 2세]] 플랜태저넷의 상황과는 달리 현실 그 자체인 경제권 차원의 접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교구로부터 들어오는 자금을 토대로 권위를 유지하던 교황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심각한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다. 1295년, [[필리프 4세]]는 성직자들에게 10분의 1 과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1296년 교령 '''《평신도와 성직자》'''(Clericis laicos)를 반포했다. 그는 이 교령에서 교황청의 동의없이는 성직자가 세금을 낼 수 없으며, 허락없이 세금을 내는 주교는 [[파문]]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필리프 4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내 주교구들이 외국으로 자금을 보내는 것을 금지한다는 칙서를 반포했다. 이로 인해 교황청의 수입이 타격을 입자, 보니파시오 8세는 1302년 교령 '''《우남 상크탐》'''(Unam Sanctam: 한 성자)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영적인 권력은 세속적인 권력보다 우월하므로 교황은 국왕보다 우월하며, 국왕은 교황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필리프 4세는 수도 파리에서 [[삼부회]]를 소집해 귀족과 부유한 평민들을 집결시킨 뒤 교황에 대항하는 자신의 투쟁을 합법화했으며 성직자 과세를 고착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국 전역에 성무금지령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필리프 4세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는 심복인 기욤 드 노가레를 시켜 보니파시오 8세를 고발하는 기소장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 기소장에는 보니파시오 8세가 저지른 혐의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1. 간통죄: 교회는 교황의 신부인데, 전임 교황이 살아있을 때 불법적으로 교황의 자리를 찬탈했으니 간통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니파시오 8세는 [[첼레스티노 5세]]가 교황직에서 자진 사퇴하도록 설득한 뒤 자기가 교황이 되자마자 첼레스티노 5세를 감금해 죽을 때까지 유폐했다.] >2. 교황의 방에 온갖 짐승과 마귀를 불러들여 수간 및 마귀와의 교접을 행한 죄 >3. 교회 재물 착복죄: 보니파시오 8세는 실제로 사치를 일삼고, 성직매매를 대놓고 벌이는 부패한 인물이었다. >4. 살인죄: 보니파시오 8세는 정적인 콜론나 가문에게 반역죄를 씌워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했고, 콜론나 가문에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정작 항복하자 모조리 죽여버리고, 콜론나 가문의 영지에 있었던 백성들까지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기욤 드 노가레와 콜론나 가문의 가주였던 시욘나 콜론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1303년 9월 7일, 그들은 아나니에 있었던 보니파시오 8세 앞에 들이닥쳤다. 교황 때문에 멸문지화를 당했던 시욘나 콜론나는 보니파시오 8세에게 욕설을 퍼붓고 모욕하면서 당장 사임하라고 협박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차라리 나를 죽여라." 라고 외치며 강력히 거부하자, 시욘나 콜론나는 끼고 있었던 장갑을 빼어 교황의 뺨을 후려쳤다. 이는 14세기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 중 하나로, '''아나니의 뺨 때리기'''(schiaffo di Anagni / Anagni slap)로 불린다. 그 후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병졸들에게 얻어 맞으며 감금당했다. 교황의 곁에 있었던 성직자들도 두들겨 맞고 교황과 같이 감금당했으며 교회의 보물들까지 빼앗겼다.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와 3일 만에 구출했지만, 보니파시오 8세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1개월 만에 선종했다. 이를 두고 당시 >"보니파시오 8세는 여우처럼 교황의 지위에 올라 사자처럼 지배하고, 개같이 죽었다." 라는 말이 돌았다. 보니파시오 8세 사후, 교황청은 1303년 10월 22일 프랑스군의 삼엄한 경비와 압박에 시달리며 교황을 선출했다. 신임 교황 '''[[베네딕토 11세]]'''는 필리프 4세가 원하는 대로 《우남 상크탐》을 무효로 하고, 필리프 4세에게 내리려 했던 파문 역시 없던 일로 했다. 그 대신, 아나니 사건에 가담한 기욤 드 노가레와 시욘나 콜론나 등을 파문했다. 또한 필리프 4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사이의 군사적 마찰에 개입해 휴전 협정을 맺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재임 9개월만인 1304년 7월 7일에 갑작스럽게 선종했다. 세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설이 파다했지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베네딕토 11세가 갑작스럽게 선종한 후, 로마에서는 '''콜론나 가문'''이 이끄는 친 프랑스 정파와 보니파시오 8세가 속했던 '''카에타니 가문'''이 이끄는 반 프랑스 파, 독자적인 교황을 선출하려는 '''오르시니 가문'''의 분쟁이 심하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교황은 11개월 동안 선출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차피 기존의 추기경 중 한 사람을 뽑아봐야 다른 정파에서 반발할 테니, 차라리 외부 인물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필리프 4세와 보니파시오 8세 사이의 정쟁이 벌어질 당시 중립을 지켰던 성직자이자 저명한 법학자인 레몽 베르트랑 드 고트를 만장일치로 지명했다. 1305년 6월 5일, 추기경들은 페루자에서 레몽을 '''[[클레멘스 5세]]'''로서 교황에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리옹에 있었던 클레멘스 5세는 1305년 11월 15일에 그 곳에서 즉위식을 치렀다. 당시 로마는 콜론나 가문, 카에타니 가문, 오르시니 가문 등 여러 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치안이 몹시 불안정했고, 급기야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 누군가의 방화로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클레멘스 5세는 이렇듯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로마에 섣불리 가지 못하고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이었던 기옌 사이를 오갔다. 또한 보르도의 전 대주교였던 그가 교황에 선출된 배경에는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지원이 있기도 했기에 그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필리프 4세는 고분고분해진 교황을 압박해 [[성전 기사단]](템플 기사단)을 재판에 회부하여 대거 숙청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막대한 재산을 빼앗았다. 성전 기사단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소집되었던 빈 공의회는 교황에게 로마로 귀환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클레멘스 5세는 >"나 역시 그러기를 바라지만, 로마의 사정이 너무 좋지 않으니 불가능하다." 고 답했다. 클레멘스 5세는 로마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프로방스 백작의 소유였던 아비뇽에 머물기로 했다. 그가 아비뇽을 선택한 것은 다음의 이유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아비뇽은 당시 서유럽 세계의 중심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의 영토이면서도 프랑스 왕국의 국경과 인접했다. 그래서 클레멘스 5세의 지지 기반인 프랑스 왕의 지원을 수월하게 받으면서도 직접적인 통제를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 바깥에 있었기에 '''기벨린파'''(친 황제파)와 '''구엘프파'''(친 교황파)의 대립, 여러 귀족 가문의 분쟁, 여러 도시 국가들과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들의 세력 다툼 등으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정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이탈리아와 가까워서 교황령 및 이탈리아 귀족, 성직자들에 대한 관리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면서 '아비뇽 유수'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